페라리 첫 전기차 ‘루체’ 인테리어 전격 공개…아이폰 낳은 조니 아이브가 5년간 빚었다
페라리가 브랜드 역사상 최초의 순수 전기차 공식 이름을 ‘루체(Luce)’로 확정하고, 실내 디자인을 세계 최초로 공개했다. 이탈리아어로 ‘빛’을 뜻하는 이 이름에는 전동화가 목적이 아닌 수단이라는 마라넬로의 철학이 담겼다. 특히 이번 인테리어는 애플의 전 최고디자인책임자(CDO) 조니 아이브와 산업 디자이너 마크 뉴슨이 이끄는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 ‘러브프롬(LoveFrom)’이 5년간 페라리와 공동 개발한 결과물로, 전기차 업계를 지배하는 대형 터치스크린 트렌드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점이 주목된다.
애플이 포기한 꿈, 페라리가 현실로
지난 9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비공개 행사에서 페라리는 루체의 실내를 처음 공개했다. 전체 외관은 오는 5월 이탈리아 본사에서 별도로 선보일 예정이어서, 이번 발표는 ‘3단계 공개 전략’의 두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지난해 10월 캐피탈마켓데이에서 전기 파워트레인과 섀시 기술을 먼저 공개한 데 이은 수순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차의 탄생 배경이다. 애플은 2014년부터 ‘프로젝트 타이탄’이라는 이름으로 자체 전기차 개발에 매달렸지만, 결국 2024년 프로젝트를 공식 폐기했다. 그런데 애플을 떠나 독립한 조니 아이브가 페라리와 손잡고 ‘애플카’의 미완성 꿈을 다른 형태로 구현해낸 셈이다. 블룸버그는 루체의 인테리어가 “아이브가 애플에서 탐구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이면서도 “깎아낸 알루미늄과 정교한 가죽 마감이라는 아이브 특유의 디자인 언어는 고스란히 살아 있다”고 평가했다.
“터치스크린 지배는 넌센스”…물리 버튼의 화려한 귀환
루체의 실내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대형 디스플레이의 ‘부재’다. 테슬라를 필두로 대부분의 전기차가 15인치 이상 대형 터치스크린을 전면에 내세우는 요즘, 페라리는 오히려 기계식 버튼과 토글 스위치, 촉각 다이얼로 가득한 조종석을 완성했다. 아이브 본인도 이날 행사에서 “전력원이 전기라고 해서 인터페이스까지 디지털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완전한 넌센스”라고 잘라 말했다.
스티어링 휠은 1950~60년대 페라리의 상징인 나르디(Nardi) 목재 핸들에서 영감을 받았다. 100% 재활용 알루미늄 합금으로 제작했으며, CNC 정밀 가공한 19개 부품을 조립해 기존 페라리 핸들보다 400g 가볍다. 양쪽 스포크 상단에 두 개의 아날로그 버튼 모듈을 배치했는데, 오른쪽은 파워트레인 모드(레인지·투어·퍼포먼스), 왼쪽은 서스펜션·와이퍼를 포함한 마네티노를 제어한다. 페라리의 기존 핸들이 앞뒤로 수십 개의 버튼이 산재한 복잡한 구성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스티어링 컬럼에 직접 연결된 12.86인치 계기판(비나클)은 삼성디스플레이와 공동 개발한 초슬림 OLED 두 장을 겹쳐 배치했다. 앞쪽 디스플레이에 정밀하게 컷아웃을 만들어 뒤쪽 화면이 비치도록 설계해, 운전자 시점에서 시계 문자판을 들여다보는 듯한 입체적 시차(Parallax) 효과를 구현한다. 여기에 실물 바늘까지 OLED 레이어 사이에 끼워 넣어,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경계를 허물었다. 계기판 전체가 스티어링과 함께 움직여 운전 자세에 관계없이 최적의 시인성을 유지하는 점도 독특하다.
고릴라 글래스·e잉크 키…디테일에 담긴 애플 DNA
실내 곳곳에는 코닝(Corning)의 강화 유리 부품이 40여 개 사용됐다. 기어 셀렉터, 센터 콘솔 주변 패널, 계기판 렌즈까지 유리를 적극 활용했는데, 아이브는 “플라스틱 대비 강도가 높으면서도 고급감이 있고, 총 중량 증가는 10kg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애플 아이폰에 쓰이는 고릴라 글래스보다 내충격·내스크래치 성능을 더 끌어올린 맞춤형 유리라는 점에서 애플 제품과의 DNA 연결 고리가 뚜렷하다.
키(열쇠)도 기존 자동차 업계에서 볼 수 없던 발상을 담았다. 코닝 퓨전5 글래스로 제작한 키 표면에 e잉크 디스플레이를 탑재했는데, 센터 콘솔의 마그네틱 도크에 키를 꽂으면 키의 노란색이 서서히 꺼지면서 기어 셀렉터 상단이 노란빛으로 점등된다. 페라리는 이를 “생명의 전이”에 빗대었다. e잉크는 색상 변경 시에만 전력을 소모하므로 배터리 방전 걱정도 없다. BMW도 유사한 e잉크 기술을 개발 중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양산차에 최초로 적용한 것은 페라리가 될 전망이다.
천장에는 헬리콥터 조종석을 연상시키는 오버헤드 콘솔을 배치했다. 알루미늄 토글 스위치로 조명과 열선 윈드실드를 제어하며, 론치 모드를 활성화하는 대형 알루미늄 레버를 당기면 주황색으로 점등된다. 뒷좌석 승객을 위한 별도의 공조 컨트롤과 속도·드라이브 모드 정보 디스플레이도 마련됐다.
1,000마력 쿼드모터…기어 변속 없는 전기차에 시프트 패들을 단 이유
루체의 심장은 네 개의 독립 전기모터다. 리막 네베라나 BMW VDX 콘셉트와 마찬가지로 전·후축에 각 두 기씩 배치해 합산 출력 1,000마력 이상, 론치 모드 작동 시 합산 토크 1만 1,500Nm를 발휘한다. 0→100km/h 가속은 2.5초, 최고속도는 310km/h에 달한다. 페라리의 F1 기술에서 파생한 소형 모터는 ‘할바흐 배열(Halbach Array)’ 구조를 채택해 자속을 고정자 방향으로 집중시킴으로써 토크 밀도를 극대화했다.
전기차에 시프트 패들이라니, 의아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페라리는 ‘토크 시프트 인게이지먼트(Torque Shift Engagement)’라는 독자 전략으로 이 문제를 풀었다. 오른쪽 패들을 당기면 다섯 단계로 토크와 출력 전달량이 점진적으로 높아지면서 내연기관 페라리의 가속 감각을 재현한다. 왼쪽 패들은 회생제동 강도를 조절해 코너 진입 시 엔진 브레이킹 느낌을 구현한다. 현대 아이오닉 5 N이나 제네시스가 시도한 가상 기어박스 개념을 페라리식으로 한층 정교하게 발전시킨 셈이다.
파워트레인 모드는 레인지(Range)·투어(Tour)·퍼포먼스(Performance) 세 가지로, 스티어링 휠의 e마네티노(eManettino) 다이얼로 전환한다. 모드에 따라 출력 전달 방식, 트랙션 컨트롤 개입도, 그리고 후륜구동 또는 사륜구동 전환이 자동으로 조정된다. 전방 e액슬에는 모터를 바퀴와 완전히 분리하는 디스커넥트 장치를 신규 탑재해, 고속 순항 시 전방 모터를 차단함으로써 효율을 높인다. 체결·해제에 걸리는 시간은 500밀리초에 불과하며, 이전 버전 대비 70% 경량화에 성공했다.
V12도 V8도 아닌 ‘전기 기타’ 사운드…모터 진동을 증폭하다
페라리의 영혼이라 불리는 엔진 사운드를 전기차에서 어떻게 대체할 것인가. 루체 개발팀은 내연기관 소리를 흉내 내거나 완전히 디지털로 합성하는 방식 모두를 거부했다. 대신 후방 e액슬 케이싱 내부에 가속도계를 설치해 모터 자체의 진동을 감지하고, 이를 증폭해 캐빈으로 전달하는 독자적 방법을 택했다. 페라리는 이 센서를 “일렉트릭 기타의 픽업”에 비유했다. 기타리스트가 줄을 튕기면 픽업이 진동을 전기 신호로 변환해 앰프로 보내듯, 모터의 물리적 진동을 음향으로 바꿔 들려준다는 발상이다. 평상시 주행에서는 추가 소리 없이 정숙성을 유지한다.
122kWh 배터리에 530km 항속거리…섀시는 F80 하이퍼카 기술 계승
루체는 122kWh 용량의 배터리 팩을 탑재하며, 페라리는 이를 “양산 전기차 중 가장 높은 에너지 밀도”라고 주장한다. 15개 모듈로 구성된 배터리는 전·후축 사이에 배치하되, 일부 모듈은 뒷좌석 아래에 이중으로 적층해 휠베이스를 늘리지 않으면서 공간 효율을 극대화했다. 셀 형태는 BMW가 채택한 원통형 대신 파우치형을 선택했는데, 높은 에너지 밀도와 경량화에 유리하다는 판단에서다. WLTP 기준 항속거리는 530km 이상이며, 350kW 급속충전을 지원해 30분 이내에 거의 완충할 수 있다.
다만 차량 총중량이 2.3톤(약 5,100파운드)에 달해 ‘루체(빛)’라는 이름과는 다소 모순적이다. 페라리의 기존 SUV 푸로산게보다도 무거운 역대 최중량 모델이지만, 페라리는 섀시 기술로 이를 상쇄하겠다는 전략이다. 배터리를 바닥에 최대한 낮게 배치해 무게중심을 내연기관 차량 대비 80mm 낮췄고, F80 하이퍼카에서 처음 도입한 48V 전동식 액티브 서스펜션을 한 단계 진화시켜 탑재했다. 댐퍼 내부 리서큘레이팅 볼스크류의 피치를 20% 늘려 노면 충격 흡수력을 개선했으며, 안티롤 바 없이도 차체 자세를 정밀하게 제어한다.
후방에는 페라리 최초의 독립 서브프레임을 적용했다. 재활용 알루미늄 일체형 중공 주조로 제작한 이 서브프레임은 탄성 부싱으로 차체에 연결돼 소음·진동·불쾌감(NVH)을 줄이면서도 주행 역동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후륜 조향은 최대 2.15도까지 작동해 저속에서는 민첩성을, 고속에서는 안정성을 확보한다. 회생제동은 최대 0.68G의 감속력을 발생시키는데, 리막 네베라(0.4G)를 크게 앞서는 수치다. 여기에 브렘보(Brembo)와 공동 개발한 신형 카본세라믹 브레이크(전방 390mm 6피스톤, 후방 372mm 4피스톤)도 별도로 장착했다.
4도어 4인승 GT…”가족과 함께 페라리를 느끼게 하겠다”
루체의 차체 형태는 아직 베일에 싸여 있지만, 페라리 제품개발 총괄 지안마리아 풀겐치는 “가족이, 친구가, 여러 사람이 함께 페라리의 경험과 감동을 나눌 수 있는 차”라고 정의했다. 4도어 4인승 GT로, V12 엔진을 얹은 푸로산게 SUV와 유사한 카테고리에 속할 것으로 예상된다. 위키피디아는 스파이샷 분석을 토대로 “슈팅 브레이크와 왜건, 세단의 교차점”이라고 묘사했다. 휠베이스는 2,959mm(116.5인치)로 푸로산게보다 소폭 짧고, 전후 중량 배분은 47:53이다.
가격은 50만 유로(약 8억 5,000만 원) 이상이 될 전망이다. 생산은 마라넬로 본사에 신설한 전용 공장 ‘E빌딩’에서 이뤄진다.
람보르기니·애스턴마틴은 연기…”지금이 적기”라는 페라리의 자신감
페라리가 전기차를 지금 내놓는 배경도 주목할 만하다. 라이벌 람보르기니는 2023년 란자도르 콘셉트를 선보인 뒤 첫 전기차 출시를 2028년으로 미뤘고, 애스턴마틴도 첫 전기 모델 출시를 2020년대 말로 늦췄다. 이런 상황에서 페라리가 먼저 카드를 꺼낸 것은 기술적 자신감에 기반한 결정이다. 베네데토 비냐 CEO는 “고객이 기대하는 주행 경험과 성능을 구현할 기술이 갖춰지기 전까지는 전기차를 출시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며 “이제 그 준비가 됐다”고 말했다.
비냐 CEO는 “어떤 기술이든 고객의 주행 쾌감을 위해 독자적으로 활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면서 “전기차여야만 페라리를 사겠다는 새로운 고객군에게도 문을 열겠다”고 덧붙였다. 럭셔리 퍼포먼스 시장에서 전동화의 성적표가 엇갈리는 가운데, 루체가 전기 슈퍼카의 새로운 기준을 쓸 수 있을지 5월 풀 공개가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