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기보다 3배 싸고, 구급차보다 3배 빠르다… 독일 스타트업 eVTOL 도전
독일의 한 스타트업이 유럽 eVTOL(전기수직이착륙기) 산업의 명맥을 이어가겠다고 나섰다. 릴리움과 볼로콥터가 잇따라 파산한 뒤 사실상 ‘사망 선고’를 받은 독일 eVTOL 업계에서 뜻밖의 주자가 고개를 든 셈이다.
뮌헨 남쪽 오토브룬에 본사를 둔 ERC시스템(ERC System GmbH)은 지난 7일(현지시간) 에르딩 옛 공군기지에서 자사의 전기항공기 ‘로미오(Romeo)’ 시제기로 첫 공개 시험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에르딩 기지는 현재 독일 연방군(분데스베어) 혁신센터로 전환 중인 시설이다. 개소식에는 보리스 피스토리우스 국방장관과 마르쿠스 죄더 바이에른 주총리가 참석해 이 스타트업의 기술력을 직접 확인했다.
‘에어택시’가 아닌 이유
ERC시스템이 선배 격인 릴리움·볼로콥터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은 사업 방향이다. 이 회사는 자사 기체를 ‘에어택시’라 부르지 않는다. 부유층 승객을 도심에서 실어 나르는 대신, 병원 간 환자 수송과 군수 지원, 화물 물류에 집중하겠다는 전략을 택했다. 공동창업자 막시밀리안 올리그슐래거 최고상무책임자(CCO)는 “매우 구체적이고 긴급한 용도(very concrete, critical use cases)에 역량을 모은다”고 밝혔다.
이 같은 노선 선택은 릴리움과 볼로콥터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릴리움은 개발비로만 15억 유로(약 2조2500억원)를 쏟아붓고도 양산 전 자금줄이 끊겨 2024년 말 파산 신청을 했다. 볼로콥터 역시 같은 해 12월 카를스루에 지방법원에 파산을 신청했다. 에어버스도 시티에어버스(CityAirbus) 프로그램을 사실상 동결했다. 한때 유럽 eVTOL 산업의 중심이던 독일에서 세 거인이 동시에 쓰러진 것이다.
EU 최중량 eVTOL의 등장
로미오는 기존 에어택시 프로토타입과 체급 자체가 다르다. 최대이륙중량 2.7톤, 날개 폭 16m에 직경 2.4m 로터 8기를 장착했다. ERC시스템에 따르면 로미오는 공개 정보 기준 EU에서 비행에 성공한 완전 전기식 eVTOL 가운데 가장 무겁고 큰 기체다. 조종석에는 파노라마 유리창과 바닥 투시창까지 설계해 향후 유인 비행 시 조종사의 시야를 극대화했다.
다만 현재 로미오가 할 수 있는 것은 호버링(공중정지)뿐이다. 지상 약 10m 높이에서 8자 비행과 간단한 기동을 선보인 뒤 5분도 채 되지 않아 시연을 마쳤다. 다비트 뢰블 CEO는 바이에른방송(BR)에 “전진 비행보다 호버링이 기술적으로 훨씬 복잡한 과제”라고 설명했다. 전진 비행을 위해서는 베타테크놀로지스(Beta Technologies)나 이브에어모빌리티(Eve Air Mobility) 등이 사용하는 것과 유사한 추진 프로펠러를 추가 장착할 계획이다.
릴리움·볼로콥터·에어버스 출신이 모였다
60여 명 규모의 ERC시스템 팀은 규모는 작지만 구성이 독특하다. 릴리움, 볼로콥터, 에어버스에서 eVTOL을 개발하던 엔지니어들이 대거 합류했다. 이들이 에어택시 개발 과정에서 축적한 기술과 노하우를 독일 내에 남기는 ‘기술 계승’ 역할을 자처하는 셈이다. 올리그슐래거 CCO는 “유럽에는 엄청난 인재 풀이 있다. (파산한) 기업들이 산업 전체를 위해 엄청난 일을 해냈다”며, 그 유산을 실질적인 결과물로 연결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ERC시스템은 2019년 설립 직후부터 수년간 ‘스텔스 모드’로 운영됐다. 레이더망 아래로 날아가는 스텔스 항공기에 빗댄 표현이다. 첫 번째 풀스케일 시제기 ‘에코(Echo)’를 2023년부터 수백 차례 비행 테스트한 뒤, 세 번째 시제기인 로미오로 2025년 11월 초도 비행에 성공했다. 에코·로미오·찰리라는 이름은 NATO 음성 알파벳으로 ‘E-R-C’를 나타낸다.
“헬기보다 3배 싸고, 구급차보다 3배 빠르다”
ERC시스템이 가장 먼저 실전 투입을 노리는 분야는 병원 간 환자 수송이다. 이를 위해 유럽 최대 항공구조대 가운데 하나인 DRF루프트레퉁(DRF Luftrettung)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었다. 독일·스위스·오스트리아 등의 HEMS(헬기응급의료서비스) 사업자들도 이미 관심을 표명한 상태다.
초기에는 응급 출동이 아니라 병원 간 전원(轉院) 수송에 초점을 맞춘다. 가령 현재 입원 중인 병원에서 특수 수술이 가능한 다른 병원으로 환자를 옮기는 경우다. 독일에서는 의료기관 통폐합과 전문화 추세로 병원 간 거리가 늘어나는 한편, 의료 인력 부족까지 겹치면서 이 같은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뢰블 CEO는 “헬리콥터 운용 비용의 수분의 일로 지상 이송보다 훨씬 빠른 수송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DRF루프트레퉁의 크리스티안 프라츠 CEO는 “2030년대에 ERC 항공기가 우리 함대에 상설 편입될 것을 확신한다”며, 바이에른주 멤밍겐-운터알고이 지역을 첫 시범 운용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양산 모델 ‘찰리’…하이브리드로 800km 비행
로미오에 이어 개발할 양산 모델의 이름은 ‘찰리(Charlie)’다. 로터 수를 8기에서 10기로 늘리고, 순수 전기 방식 대신 레인지 익스텐더(연료 발전기로 배터리를 충전하는 하이브리드 시스템)를 탑재해 항속거리 800km를 목표로 한다. 최대이륙중량 3.3톤, 유효 탑재량 500kg 사양으로, 조종사가 탑승하는 유인 기체다.
ERC시스템은 찰리의 유럽항공안전청(EASA) 인증을 2031년까지 완료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인증 캠페인에는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드는 만큼, 이 과정에서 좌초한 선배 스타트업들의 전례가 적지 않다. ERC시스템은 독일 항공우주 시험·인증 전문기업 IABG를 전략적 투자자로 확보해 자금뿐 아니라 인증 노하우까지 지원받고 있다.
여기에 올해 안으로 무인 화물 수송 기체의 프로토타입도 비행시킬 예정이다. 군 수요를 겨냥한 이 기체는 로미오의 부품 일부를 재활용하며, 양산 시기도 찰리보다 앞당긴다는 구상이다. 분데스베어와의 협력을 통해 군사 시나리오에서 대형 무인기를 빠르게 테스트할 수 있다는 점이 ERC시스템의 독보적 강점이다.
한국 UAM 시장에 던지는 시사점
한국도 도심항공교통(UAM) 상용화를 향해 달리고 있지만, 속도에서 중국은 물론 미국에도 뒤처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대차그룹 산하 슈퍼널이 2028년 LA올림픽을 목표로 eVTOL ‘S-A2’ 양산을 준비하고, 한화시스템이 오버에어와 ‘버터플라이’를 공동 개발하는 등 대기업 주도의 투자는 활발하다. 그러나 지난해 K-UAM 2단계 실증에서조차 eVTOL 실물 대신 헬리콥터를 대역으로 투입해야 했을 정도로 실물 기체 확보에는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다.
ERC시스템의 사례는 몇 가지 시사점을 남긴다. 첫째, ‘에어택시’라는 화려한 비전 대신 의료·군수·화물이라는 당장의 수요처를 공략해 사업 리스크를 줄였다. 둘째, 처음부터 실물 크기·실제 중량의 시제기를 띄워 기술 검증 주기를 앞당겼다. 셋째, IABG 같은 인증 전문 기관을 전략적 투자자로 끌어들여 ‘인증의 벽’에 대비했다. 한국의 K-UAM 생태계가 실증 단계에서 상용화로 넘어가려면, 기체 개발뿐 아니라 인증·운용 인프라 전반에 걸친 현실적 전략이 필요하다는 점을 독일의 후발 주자가 일깨워주고 있다.















